정몽규-클린스만 입 안 맞는다 "농담조로 감독직 제안, 회장이 몇 주 뒤 직접 연락"
컨텐츠 정보
- 165 조회
"벤투 감독 선임 때와 같은 과정으로 클린스만 감독을 선임했다."
거짓말도 장단이 맞아야 한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은 해명은 사실이 아니었다. 당사자인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이 정당한 프로세스 없이 한국 축구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고 인정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독일 언론 '슈피겔'은 2023 아시아축구연맹(AFC) 카타르 아시안컵이 한창이던 지난달 21일 클린스만 감독을 심층 취재한 보도를 했다. 이들은 한국을 방문해 파주 축구대표팀트레이닝센터(NFC), 대표팀 평가전 등을 살폈고, 미국 캘리포니아 클린스만 감독의 자택에서도 인터뷰한 내용을 다양하게 실었다.
클린스만 감독은 정몽규 협회장과 인연부터 이야기했다. 지난 2017년 한국에서 열린 20세 이하(U-20) 월드컵에 아들이 출전하면서 방한해 만난 게 관계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2022년 국제축구연맹(FIFA) 카타르 월드컵 도중 VIP 구역에서 둘은 다시 만났다.
클린스만 감독은 당시 FIFA 기술연구그룹(TSG) 일원으로 월드컵을 돌아보고 있었다. 정몽규 회장은 파울루 벤투 전 감독이 16강에서 브라질에 패하고 결별을 밝혀 향후 계획을 세워야 하는 상태였다. 클린스만 감독은 "정몽규 회장에서 '코치를 찾고 있느냐'고 장남삼아 말했다. 그러자 정몽규 회장이 '진심이냐'라고 되물었다"라고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클린스만 감독이 말한 것처럼 인사치레의 농담조였다. 그런데 약속을 잡아 다음 날 도하의 한 호텔 카페에서 만났고, 또 다시 선임 이야기를 나눴다. 클린스만 감독이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라. 우리가 오랫동안 알고 지내서 그냥 한 말이다. 흥미가 있으면 연락을 달라'라고 했다. 정몽규 회장은 몇 주 뒤 클린스만 감독에게 직접 연락해 '매우 관심이 있다'라고 화답했다. 클린스만 감독도 "농담에서 모든 일이 시작됐다"라고 털어놨다.
정몽규 회장이 공개석상에서 해명한 것과 배척된다. 정몽규 회장은 지난 16일 클린스만 감독을 경질하는 자리에서 선임 과정이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클린스만 감독 선임 과정에 대해 여러 오해가 있는 것 같다. 벤투 감독 선임 당시와 같은 과정으로 진행했다"라고 항변했다.
그러면서 "벤투 감독도 1, 2순위 후보가 답을 미뤄 3순위로 결정했다. 클린스만도 61명에서 23명으로 좁혀 최종 5명으로 우선 순위로 정했다. 마이클 뮐러 국가대표 전력강화위원장이 후보들과 인터뷰도 했다. 우선 순위 1, 2번을 2차 면접 진행했다. 최종적으로 클린스만 결정했다"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클린스만 감독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정몽규 회장은 이미 감독 선임 과정을 밟기 전부터 사령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클린스만 감독 선임 당시 전력강화위원들이 최고 결정권자로부터 발표 30분 전에야 통보 방식으로 전달받았다는 소식은 익히 알려진 대목이다. 전력강화위 기능을 식물로 만들고 위원들을 거수기로 치부한 배경 뒤에 클린스만 감독의 농담이 시발점이라는 건 씁쓸함을 남긴다.
클린스만 감독은 이 기사에서 정몽규 회장과 돈독한 관계를 강조했다. 클린스만 감독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곧바로 정몽규 회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직접 대면도 했다"라고 했다. 클린스만 감독은 한국에서 짧게 머무는 동안 용산역 인근 호텔에 거주했다. 정몽규 회장의 HDC현대산업개발 본사 역시 용산역에 있다.
쉽게 들통날 핑계로 위기 모면에만 신경쓴 정몽규 회장은 현 사태의 잘못 인정 없이 대한축구협회장 4선 도전을 우회적으로 밝혔다. 2013년부터 현재까지 3선으로 축구협회를 이끌고 있는 정몽규 회장은 단독 입후보한 AFC 집행위원 당선을 발판 삼아 계속해서 수장직을 이어가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은 "우선 일을 잘하는 게 가장 우선 아니겠느냐"라고 부정적인 견해를 에둘러 드러냈다. 여기에 클린스만 감독 선임 과정에 대해 거짓도 밝혀져 명분마저 사라지게 됐다.
한편 아시안컵 성적 부진으로 경질된 클린스만 감독은 자기 변호에 힘을 쓰고 있다. 최근 슈피겔과 다시 인터뷰를 한 클린스만 감독은 "경기 측면에서 봤을 때 아시안컵은 성공적인 결과"라며 "절대 포기하지 않는 정신을 한국에 불어넣었다"며 "사우디아라비아와 16강전, 호주와 8강전은 "그야말로 순수한 드라마와 같았던 경기"라고 이해 못할 분석을 내놓았다.
아시안컵 준결승 진출을 성공이라 여기는 건 클린스만 감독만이 아니다. 그의 오른팔로 전술 준비를 책임졌던 안드레아스 헤어초크 수석코치는 오스트리아 매체 '크로넨 자이퉁'에 기고한 칼럼에서 "아시안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후 나와 클린스만 감독은 한국에서 계속 좋은 일을 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스포츠 측면에서 목표를 달성해 북중미 월드컵까지 갈 수 있었다"며 "정몽규 협회장도 우리를 계속 지지해줬으나 거센 압박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했다.
우승에 실패한 이유로 선수들을 지목했다. 요르단과 준결승 전에 손흥민(토트넘 홋스퍼)과 이강인(파리 생제르맹)이 탁구를 치는 것을 두고 몸싸움을 벌인 걸 물고 늘어진다. 선수들의 신경전이 내분으로 번지는 걸 관리하지 않고 방관했으면서도 "4강을 앞두고 식당에서 벌어진 손흥민과 이강인의 감정적인 싸움이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 손흥민과 이강인이라는 톱스타들이 세대 갈등을 벌일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며 "팀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싸움이었다. 나는 식당과 같은 훈련장이 아닌 곳에서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없다. 몇 달 동안 공들인 부분이 불과 몇 분 만에 무너졌다"라고 패인을 선수들에게 돌렸다.
아시안컵을 앞두고 클린스만 사단에 분석관으로 합류한 마크 포더링햄도 자신의 커리어에 더 신경썼다. 그는 '더선'을 통해 "스코틀랜드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나를 엄청난 경력을 쌓은 클린스만 감독이 불러줬다. 그에게 모든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맡아 정말 감동적인 시간을 보냈다"며 "클린스만과 같은 감독이 어떻게 일을 하는지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그를 정말 존경하며, 그와 함께 일할 기회가 또 주어졌으면 한다"라고 경험에 무게를 뒀다.
클린스만호의 스태프들은 떠났다. 주도하는 축구로 카타르 아시안컵 16강에 진출했던 한국 축구는 아시아에서도 좀비 축구를 연상시킬 정도로 퇴보했다. 이러한 결과물을 만들어낸 축구협회의 운영 및 지도력 난맥상을 하루 빨리 개선해야 한다.